아픈 부위의 피를 빼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생각은 동양에서 수천년을 이어왔다.
중국 고서‘황제내경’이나 우리 고전‘동의보감’에도 피를 뽑아 치료하는 방법이 언급돼 있다. '부항(附缸)' 도 아픈 부위의 피나 고름을 뽑아 치료하는 것이다. 손주가 체했을 때 할머니가 손가락 끝을 바늘로 따주던 것 역시 비슷한 개념이다.
한의학에서는 이를 '사혈(瀉血)요법' 이라 한다. '사(瀉)'는 '쏟아버린다' 는 뜻으로 피를 쏟아버리는 치료법이란 의미다. 사혈침을 찔러 피가 나오게 한 뒤 그위에 작은 항아리처럼 생긴 부항기를 붙여 내부 압력을 줄이면서 피를 몇 백cc 뽑아낸다.
하지만 손가락 끝을 바늘로 따는 정도를 넘어 혈액을 100cc이상 뽑는다면 어떨까? 한의사나 의사가 아닌 일반인들이 몸에 침을 찌르고 피를 이렇게 많이 빼도 괜찮을까?
노인들, 주머니에 사혈침 휴대
사혈요법이 만병통치의 ‘비방(秘方)’인양 확산되고 있다. 전국에 100곳 넘는 지점을 둔 사혈요법 단체가 성업(盛業) 중인가 하면, 찜질방에 둘러 앉아 사혈침을 쓰는 사람들도 있다.
10여 곳의 출판사에서 내놓은 책들이 대형서점 건강코너 한 쪽을 차지하고 있다. 사혈요법 서적 저자의 직업은 체육인부터 경영인까지 다양하다. 할인마트, 의료기상 등에서도 사혈침이 인기 품목이고, 주머니나 가방 속에 사혈침을 넣고 다니는 노인도 많다. 효험을 봤다는 현역 국회의원의 체험담도 한 사혈요법 홈페이지에 올라 있다.
잇따르는 피해자들
지난달 50대의 K씨가 운전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브레이크를 밟는 도중 숨이 멎은 것으로 경찰은 추정했다. 2002년 협심증 진단을 받은 K씨는 작년 11월부터 석 달여 동안 한 무면허 의료인으로부터 사혈시술을 받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K씨의 아들은 “병원 치료를 받아 병세가 호전됐던 아버지가 갑자기 사망한 것은 사혈요법 때문”이라며 “면허도 없는 사람이 매주 200~600cc의 피를 뽑았다”고 말했다. 유족들은 해당 사혈요법 연수원을 상대로 소송을 준비 중이다.
만성신부전증을 앓던 L(51)씨도 2005년부터 1년 가까이 어느 사혈요법 연수원에서 1000여만원의 비용을 들여 사혈요법을 배웠다. 그는 “연수원 다니던 사람이 사혈요법으로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다고 말해 배우기 시작했다”며 “그러나 효과는 조금도 못보고 병세가 악화돼 결국 아들의 신장을 이식 받았다”고 말했다.
해당 사혈요법 협회 관계자는 “의료사고가 발생한 것은 일부 회원들이 협회 규정을 어기고 무리하게 시술했기 때문”이라며 “협회는 무리하게 피를 뽑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회원이 다른 회원을 사혈해주는 무면허 의료행위를 일체 금지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동양·서양의학의 사혈요법
사혈은 한의학의 치료방법 중 하나다. 한의학에선 탁해져 뭉친 피(어혈·瘀血)를 제거하기 위해 사혈을 한다. 어혈을 방치하면 통증, 어지러움 등 여러 병이 생긴다고 알려져 있다. 기혈순환을 촉진할 때도 사혈 한다. 체했을 때, 마비가 올 때 손가락 끝에 피를 내주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지난해 한국한의학연구원 의료연구부와 동국대 한의대 침구학 교실이 전국 한의사 322명을 조사한 결과 10명 중 9명(89.5%)에 가까운 288명이 사혈치료를 하고 있었다.
이 중 28.7%(82명)는 하루 환자 중 절반 이상, 51%(147명)는 10~40% 환자에게 사혈치료를 하였다. 한의사들이 사혈치료를 하는 환자는 주로 ▲팔목·어깨 등을 삔 환자(60.2%) ▲어혈환자(24.4%) ▲급체환자(6.5%) ▲의식불명의 응급환자(1.3%) 등이다.
서양의학에선 혈액 중 적혈구가 비정상적으로 증가해 피가 끈끈해지는 진성적혈구증다증(Polycythemiavera)일 때 500cc 가량의 피를 뽑아 점도를 낮추는 것 외에는 사혈치료를 하지 않는다. 진성적혈구증다증도 10만 명에 2명꼴로 매우 희귀한 병이다.
자가(自家) 사혈요법은 위험
사혈은 전문 의료행위다. 잘못하면 조직 손상, 탈진, 감염 등 치명적인 부작용이 따를 수 있다. 체계적인 교육과 훈련을 받은 전문가들이 시술해야 한다.
최근 무면허 의료인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사혈요법은 위험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인터넷에는 심지어 정수리나 얼굴 등에 사혈요법을 실시하는 사진들까지 버젓이 올라 있다. 한의사 등 전문가들이 시술해야 하는 사혈요법이 일반인들의 손으로 넘어오면서 의학적 진단이나 치료 기준 없이 마구잡이로 실시되고 있는 것이다.
경희대한방병원 침구과 이재동 교수는“무분별한 사혈요법 확산은 건강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며“사혈요법은 한의학의 한 치료법인만큼 엄격한 기준에 따라 시술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사람은 사혈요법 금물!
① 어린이=혈관이 미성숙해 사혈부위가 크게 손상될 가능성이 있다. 또 출혈에 대한 공포가 크기 때문에 정신적 충격을 받을 수 있다. 한의학에서도 에너지원 등을 뜻하는 혈(血)이 완전히 성숙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어린이에게는 사혈시술을 하지 않는다.
② 고혈압 환자=가정용 사혈침으로 손가락 끝에 피를 내는 것조차도 위험할 수 있다. 혈압이 높은 사람, 평소 몸에 열이 많은 사람, 흥분을 쉽게 하는 사람들은 자극에 무척 민감하다. 뇌출혈로 쓰러지거나 마비 증상을 보일 때 손가락을 따면 출혈이 심해질 수 있다. 출혈량이 많아지면 출혈성 빈혈이 생기거나 탈진할 수 있다.
③ 심장질환자=사혈을 하면 피가 부족해져 심장에 무리가 올 수 있다.
④ 당뇨병환자=사혈부위 상처가 잘 아물지 않기 때문에 감염 위험이 높다.
⑤ 피부질환자=피부 이상 반응이 나타날 수 있다. 상처도 깨끗하게 아물지 않는다.
⑥ 임신부 및 노약자=임신부는 철분이 부족하다. 피를 다량 뽑아 철분이 더욱 부족해지면 빈혈이 심해지고 심할 경우 유산할 수 있다. 노인, 월경 중에 있는 여성, 코피가 잦은 사람들도 빈혈이 심해지거나 탈진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이들에게는 가급적 사혈처방을 하지 않으며, 만일 할 경우에는 혈을 보(補)하는 한약처방을 병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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