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소개될 명상기법들은 10살짜리 꼬맹이가 고안하고 행했던 것이다. 그래서 잡다한 논리와 지식으로 머리를 굴려야 할 필요도 없고 인생은 마라톤이다라는 식의 인내심을 가질 필요도 없다. 부디 어린아이의 놀이처럼 장난처럼 따라 해 보라. 일부러 책을 얇게 만들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말 속에서 허우적거리기 보다는 단 한번의 느낌을 가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10여년 전만 하더라도 좀 이상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요가가 이제는 건강을 위한 최상의 레져 스포츠로 그 효용성을 인정 받고 있다. 사실 요가도 명상기법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다. 보다 실용적인 다양한 명상기법들이 개발되고 전파된다면 종교와 사상에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유용하리라 생각한다.


# 불꽃놀이 


 왜 삶은 즐거움과 고됨이 마치 언덕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처럼 번갈아 오는 것일까 라고 고민 했었던 적이 있다. 차라리 재미는 좀 없더라도 평지만을 걸을 수 있다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 열망은 결국 나를 구도의 길로 이끌었고 다양한 명상의 전통과 기법을 거쳐 결국은 스스로를 관조하는 불교 선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당시 유행하던 쿤달리니 명상을 시험 삼아 시도해 보게 되었는데 그날은 이틀째 되는 날 밤이었다. 나는 평상시처럼 반가부좌를 하고 눈을 반쯤 감은 상태에서 길고 가느다란 호흡을 따라 나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다만 쿤달리니 명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척추꼬리뼈에 기운이 모인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조금은 달랐다. 사실 불교 선의 전통에 따르면 그런 느낌도 결국은 마음의 작용이니 괘념치 말라고 되어 있다.

근데, 어라! 척추꼬리뼈에 불이 붙은 것 같은 느낌이 시작되더니 점점 올라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 기운이 머리 꼭대기에 도달 했을 때 나는 세상이 완전히 뒤집히는 줄로만 알았다. 불도 안 켰는데 세상 모든 원자 하나 하나가 동시에 불꽃으로 화한 것처럼 엄청난 빛으로 환해졌고 내가 방에 앉아 있는 건지 어디 천국에서 날고 중 인지 헤갈릴 정도의 순도 100%짜리 환희가 시작됨과 동시에 내 의식 속의 끊이지 않던 논리와 욕구와 그 밖의 생각들이 마침내 끊어져 버렸다.

 참 대단한 불꽃놀이였다. 그 이후 나는 다시는 그 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 단 한번의 체험은 내 인생의 극점이며 홀로 너무나도 높은 것이어서 왠만한 일들은 그저 다 같이 고만고만하게 평지를 걷는 것 같이 느끼게 된 것이다. 나는 왠만한 일에는 거의 동요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더 희안한 일은 그 이후 거의 6개월 동안 환희가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세상에 어떤 마약이 한번 투약으로 6개월이나 지속될 수 있겠는가. 또 신기한 것은 아무리 뛰어다녀도 지치지 않았고 심지어 일부러 산길을 막 뛰어 올라가 봐도 마치 구름을 타고 걷는 것처럼 힘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르키고 휘저으면 구름들이 흩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자아에 대한 인식의 폭이 넓어졌고 그에 따라 내 주변 현상들은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졌으다. 조금 후에 일어날 일들조차 이미 알고 있는 듯 했다. 내친 김에 염력도 개발해 보면 어떻게 안될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정도를 추구하는 수행자임을 자부하고 있었기에 그만 두었다.

어쨌든 이렇게 오랜 기간 이런 현상이 벌어졌다는 것은 뇌의 일시적인 화학적 변화가 아니라 반영구적인 구조적 변화가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다. 이제는 당시의 초감각적인 현상들이나 확장된 인식을 평상시에 느끼기는 힘들지만 특정 상황에서는 다시 그와 같은 느낌이 되돌아온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남들은 평지에서 헤매고 있을 때 홀로 날아올라 높은 곳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먼저 효율적인 액션을 취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운이 지독하게 좋은 녀석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것이 단순히 운에 달린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나는 명상을 통해 3차원의 뇌를 개발했고 순간 날아올라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고 싶은 극단적인 효율성 즉 초능력이다.

황당하고 엉뚱한 이야기를 믿느냐 마느냐는 독자에게 맡긴다. 나로써는 이 이야기들이 내 인생 그 자체이며 나뿐만 아니라 가족들과 끊임없이 주고 받은 이야기이므로 어디 갖다 버릴려고 해도 버릴 곳이 없다. 불교 선이니 쿤달리니 명상이니 어려운 용어가 많았지만 앞으로의 이야기에는 이런 머리 아픈 단어는 없으니까 걱정 마시라. 이 책이 도 닦는데 목숨 건 사람들을 위한 것도 아니니까 필자가 겪은 시행착오를 한 순간에 넘어서 생활 속에서 즐길만한 명상기법들을 지금부터 소개하겠다.


# 옆으로 누워서 팔 흔들기


어린 시절 방과 후 집에서 뒹굴뒹굴 했었던 그 시절이 그립다. 오후 햇살이 마루의 반쯤 차지하는 시간이면 나는 바닥에 등을 기대고 창밖 풍경을 구경했다. 심심하면 동생과 장난치고 책을 읽기도 했다.

그러다가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서 한쪽 팔을 들어 본다. 팔꿈치를 펴고 하늘을 향해 곧추 세운다. 적당히 힘을 빼고 팔을 무심코 느끼고 있노라면 요것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처음에는 좌우로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흥이 나는지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아간다.

꽤 오랫동안 팔을 치켜들고 있었는데도 힘이 들지도 않는다. 학교에서 벌 받을때는 팔을 1분만 들고 있어도 견디기 어려운데 말이다. 10분 동안 그렇게 놀고 있으니 팔이 저절로 돌아가고 있는 모습이 아주 재미있다. 근데 도대체 내 팔을 돌리고 있는 이 기운은 뭐란 말인가. 팔의 움직임보다는 이제 팔을 둘러싸고 있는 그 느낌에 집중해 보도록 한다. 그 느낌은 묵직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순간 무게가 없는 것처럼 가볍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게 수퍼 사이어인의 에네르기파를 구성하는 원기가 아닐까.

나는 이제 와서야 그 정체가 무엇인지 짐작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정체를 알리기 전에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내가 하는 말은 아직 과학적 조사를 거치지 않았으며 개인적인 추론이라는 사실 그리고 내 말이 만약 과학적 조사를 거쳐 발표된 결과일지라도 그 내용은 당신의 명상에 하등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많은 명상서적에서는 정답을 제시하곤 한다. 그러면 독자들은 아하! 머리로 이해할 수가 있다. 그렇지만 명상은 결코 말로 설명하거나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얄팍한 지식, 섣부른 단정 그리고 경외심의 상실 덕분에 명상에 방해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명상에 관한 모든 책은 거짓말일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의견을 밝히려는 것은 명상에서 거품을 빼고 싶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힘들은 항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악용되었다. 현대에도 장사꾼들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명상에 나름대로의 이름을 붙이고 포장해서 만병통치약인양 팔아 먹고 있다. 그 결과 단순하고 빛나던 명상기법들이 부풀려지고 왜곡되어 결국은 가치를 상실하고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몸의 감각신경계는 압각,통각,온도감각,떨림감각,위치감각 등이 있다. 그 중 위치감각은  당뇨나 퇴행성질환자들의 경우 말초에서 소실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환자가 눈감고 있을 때 환자의 손가락 구부려보면 10도 정도 구부렸는지 70도 이상 구부렸는지 환자는 알지 못한다. 건강한 사람의 경우는 위치감각 정도야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거의 인식을 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옆으로 누워서 팔 흔들기를 해 보면 평소에 잘 인식하지 못하던 그 감각을 제대로 느껴볼 수 있다. 오른손잡이가 왼손으로 젓가락질을 하거나 글씨를 써 보는 것도 좋은 일이다. 잘 쓰지 않는 느낌이나 기능을 찾아내 그에 따른 뇌기능을 개발해 보라.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그 행위와 느낌에 몰입해 보는 것이다. 목적이나 이론 따위는 아는 듯 모르는 듯 신경 끄고 아이처럼 장난질을 해 보라. 이는 명상을 위한 훌륭한 준비운동인 셈이다.


# 보도블럭 보고 걷기


초등학교때 혼자 버스를 타고 다녔다. 학교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길은 멀게만 느껴졌고 지겹기도 했다. 같이 갈 친구도 없고 약간 우울한 기분에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걷던 나는 내가 보도블럭을 일정한 간격으로 밟으면서 걷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거 재밌네, 친구랑 게임하는 것 같잖아. 보도블럭 보고 걷기에 몰입하다보니 어느새 버스 정류장에 도달해 있었다. 훨씬 더 빨리 온 것 같은데 별로 힘도 안 들고 약간 우울하던 기분은 어느새 풀려 있었다.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나는 보도블럭을 보고 걸었다.

그러다나 나는 하나의 규칙을 더 넣기로 했다. 보도블럭은 일정한 간격으로 밟고 있지만 내가 내다보는 블록의 개수를 하나씩 늘여나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걸음은 일정하게 보도블럭 한 개씩을 밟고 있지만 눈으로 바라보는 보도블럭은 처음에는 한 개 앞의 것이지만 점차 두 개 앞, 세 개 앞으로 늘어난다. 이 규칙은 게임의 난이도를 높였고 나는 그것에 도전 하는 것이 즐거웠다. 내 발과 눈이 따로 움직여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눈은 올바르게 블록을 바라보는데 그것만 신경 쓰다가는 발이 엉뚱한 보도블럭을 밟아 버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나는 혼자서 하하하 하고 웃고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 그러다보면 나는 분명히 걸어온 것인데 축지법이라도 쓰는 것처럼 금새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 있다.

이 명상기법은 갑자기 바다 보러 가고 싶어! 외치는 사람에게 적극 추천한다. 눈으로 내다보는 블록이 한 개 앞 일 때는 거의 발끝만 쳐다보고 걷는 셈이다. 그러나 두 개 앞, 세 개 앞 그렇게 늘어나다 보면 아마 당신은 놀라게 될지도 모른다. 당신이 매일 걷던 그 길가에서 바다만큼 넓은 당신의 시야와 인식의 폭을 경험하게 될 것이니.

사람들은 걸으면서도 머릿속에는 온통 생각이나 감정으로 가득 차 있다. 산책 나온 사람조차도 산책이라는 주제와 여유라는 범주에 갇혀 있는 경우가 많다. 눈은 앞을 쳐다 보고 있지만 상당부분의 시야는 무의식적인 인식일 뿐 많은 것들을 지나치고 있는 것이다.

보고 걷기에서 단순히 눈이 바라보는 거리를 늘여가는 것만이 아니라 일정한 걸음 거리를 유지하는 이유는 보통 사람들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의식적으로 하려고 하면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은 결국 잡생각 없이 제대로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이다.


# 꽃에게 인사하기


현대인들은 자기만의 일에 골똘해서 너무 바쁘다. 지나다니는 길에 있는 꽃들이 어젯밤 잘 잤는지 풀이 죽어 있는지 목말라 하지 않는지 살피지 않는다. 아니 눈길 한번 안주고 안녕이라는 말 한마디 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눈여겨 보지 않는다.

예술품 경매장에는 그림들이 아주 비싼 값에 거래가 되고 있지만 다른 모든 요소를 제외하고 단순히 미적인 관점에서만 가격을 매긴다면 그 어떤 비싼 정물화도 우리 집 앞뜰에 자라는 화초들에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아무리 천재적인 작가가 그린 그림이라도 자연이 빚어낸 풀 한포기의 아름다움을 흉내조차 내지 못한다. 우습게도 인간이 신에게 한판 겨루자는 것과도 같다.

나는 식물들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곤 한다. 맙소사, 저것 좀 봐! 숨이 막힐 정도로 멋지잖아. 경외심을 느끼며 그렇게 바라보고 있노라면 대자연과 신 앞에서 인간의 자만심과 오만함이란 하룻강아지의 그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꽃 앞에서 우리는 겸허해 질 수 있다. 더군다나 식물은 우리와 가장 가깝고 그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러나 어디 꽃뿐 이겠는가 경외심을 가지고 바라보면 이 세상은 정말 신성으로 가득 차 있다. 한마디 더 하자면 무뚝뚝하고 무감동적이라는 것은 뇌가 굳었다는 증거다.


# 산길 내려오기


이제 생각해 보니 나는 어렸을 때 등산을 참 즐긴 것 같다. 시간만 나면 동네 앞산 중턱에 있는 체력 단련장에 가려고 산을 올랐던 것이다. 체력 단력을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고 그냥 그곳에 있는 놀이 기구들이 꽤나 재미있었기 때문에 자주 갔던 것 같다. 하여튼 뭐든지 재미가 있으면 거창한 목표 따위는 없어도 열심히 할 수 있는 것 같다.

실컷 놀다가 내려올 때는 지칠 것도 같은데 나는 편한 등산로를 포기하고 냇물이 흐르는 돌 길을 선택한다. 왜냐 하면 재미있기 때문이다! 아, 정말 나는 재미라는 말을 많이 하는 것 같다. 나한테는 조금 더 힘들고 편하고 보다는 얼마나 재미있느냐 없느냐가 훨씬 중요하다.

어쨋건 놀다보니 해는 저물어 가는데 어린애의 걸음으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나는 잽싸게 돌에서 돌로 건너뛰며 냇물을 따라 산을 내려간다. 다양한 크기, 모양, 위치, 부속물의 바위와 돌을 적절하게 선택하여 미끄러지거나 물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빠르게 내려가는 것을 말로 다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아니 동물적인 감각과 함께 무아지경에 빠져 내려가고 있는 나 자신이 스스로 믿기지가 않을 정도다. 그렇게 발 디딜 돌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발부터 먼저 내밀어 놓고 디딜 돌을 찾다가는 굴러 떨어질 것만 같기도 하다. 하지만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내 조그만 머리로는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 불안하지만 지나고 보면 그 불안함은 대부분 쓸데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맞다 그렇게 스스로 불안해 할 정도로 빨리 돌길을 내려오는 것은 분명 위험할 수 있다. 당신의 심신이 충분히 건강하지 못하거나 뛰는 것과 관련된 구조적 문제가 있다거나 하면 이런 놀이를 즐길 수 없다.

적당한 불안은 정상적인 방어능력이다. 불안은 의식적인 부분이 감당하지 못할 것에 대비해서 생기는 어떤 것이다. 그리고 의식이란 것은 사실 뇌기능 중의 일부분으로써 일상에서 흔한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무의식 중의 일부가 돌출된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불안을 즐길 배짱이 있으면 불안을 제어하고 의식을 넘어서서 거대한 무의식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가령 예를 들어 훨씬 더 증폭된 여러 감각들, 신체기능, 판단능력 등은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는 마치 초능력과 같은 것이다. 당신은 이제까지 그 조그만 머리가 당신 자체라고 생각해 왔는지도 모른다. 산길 내려오기를 하다보면 조그만 머리를 맹신하는 태도가 얼마나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인지 알게 될 것이다.


# 아침에 기지개


 항상 나보다 먼저 일어나 나를 위해 아침을 준비하는 아내가 고맙다. 그녀가 만드는 물소리, 쇠소리, 불소리에 나의 잠은 깨기 시작한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기지개를 켜는데 주로 허리를 비트는 행동이다. 그리고는 가만히 누워서 근육이 충분히 조율 되었나 손끝 발끝까지 점검을 해 본다. 이상 없다고 생각되면 그때서야 무리 없이 슬슬 일어난다.

맑은 정신을 빠른 시간 내에 찾기 위해서도 기지개는 필수다. 하품과 더불어 각성을 위한 거의 본능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기지개는 특히 척추 주위 근육을 수축시켜 척수에서 나가는 근신경들과 들어오는 감각신경들을 일시에 흥분시키고 조절하여 중추신경계도 덩달아 각성시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루 중에 정신이 제일 맑다는 오전시간에도 나는 짬을 내어 기지개를 한번 씩 꼭 켠다. 누가 보면 무술 연습 하느냐 라고 물을지도 모르겠고 좀 더 유식한 사람은 그거 기공체조 아니냐 라고 궁금해 할지도 모르겠다. 누가 뭐라고 그래도 나는 내 행동을 기지개라고 부른다. 특정 초식에 맞추어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이 느끼는 대로 나아간다.

기공 수업을 들어보는 것도 좋겠지만 기지개에 관해서는 이미 수 만년 동안 유전자를 통해 당신의 몸에 각인되어 있다. 골격근들을 적당히 긴장시켜서 자극을 주고 또 이완시키며 조율하는 것을 굳이 ‘밖에서 찾기’ 편집광처럼 자료를 뒤져야 하고 남에게 물어야 할 필요는 없다. 마음의 부유물이 침전되기 시작하면 내면의 등불이 보일 것이고 그러면 남에게 기대지 않고 자기 갈 길을 갈 수 있다. 잠에서 깰 때처럼 기지개를 큰 동작으로 거칠게 한꺼번에 끝내는 것이 아니라 보다 섬세하고 세련된 동작으로 뿌듯한 그 느낌이 점차 증가 되도록 하면 된다.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졸리는 상태에서 기지개를 켜면 각성상태가 되는 것처럼 각성상태에서도 기지개를 제대로 켜면 초각성상태가 될 수 있다. 요가나 기공도 따지고 보면 제대로 기지개 펴는 방법을 정리한 것이다. 그렇다고 편리하게 기계로 등허리 근육을 주무르고 두들기거나 혹은 전기로 수축, 이완 시키고 침으로 찔러 자극하는 것으로만 기지개의 효과를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 당신의 자발적이고 전신적인 행동이 필요한 것이다.


# 아이스크림 맛보기


맛있는 아이스크림은 나에게 행복 그 자체다. 그냥 흔한 아이스크림보다는 유명한 아이스크림들을 찾아다니며 맛보라. 비록 첫 숫가락 이후로 혀의 감각이 금방 둔화되긴 하겠지만 그 짜릿한 첫 순간만으로도 값을 지불할 가치가 있다. 그런데 이런 맛을 잘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 것 같다. 나로써는 혀가 둔화되어 맛도 제대로 느끼지 못한 채 먹어 버린다는 사실이 무척 안타깝기도 한데 말이다.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엄마 잘못이 크다. 엄마가 이유식의 의미를 제대로 몰라서 처음부터 여러 재료가 혼합된 것을 아기에게 먹이게 되면 아이가 자라서 맛을 잘 느끼지 못할 가능성이 커진다. 왜냐면 이유식은 엄마젖과 밥의 중간 단계이기도 하지만 아이의 맛 감각을 개발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맛을 모르면 여러모로 손해볼 공산이 크다.

물 맛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현대인들은 마실 물에 대해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어서 딱히 물의 맛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과거 상하수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던 시대에는 물맛을 제대로 알지 못하다가는 해로운 물을 마시고 죽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밥 맛이 중요하다. 맛있는 밥은 반찬 없이도 먹을 수 있다. 짜고 매운 한국인의 식탁에서 반찬이 너무 강조되고 밥 맛은 약간 뒷전인 것 같다.

맛에 대해서 까탈스러운 것 보니까 필자가 분명 반찬투정 엄청 할 것이라고 오해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필자는 아무 것이나 잘 먹고 그릇을 싹 비우기 때문에 아내에게 사랑받는 남편이다. 어쨋든 아내는 요리에 대한 나의 평가에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으며 그 때문에 자신의 요리실력을 향상 시키기 위해 좀 더 노력하는 것 같다. 요즘 그녀의 스파게티 솜씨가 상당히 만족스러워서 행복하다.

뇌의 감각중추에서 혀가 차지하는 비중은 꽤 크다.  맛이라는 요소가 인생에서 포기할 수 없는 것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우적우적 먹지 말고 음미해 보라. 혀 끝에서 목구멍까지 그리고 위장에서 혈관을 타고 온 몸 구석구석까지 퍼지는 그 느낌을 간직해라. 명상의 전통에는 갈고 닦는 길과 지금 이 순간 깨치는 길이 있다. 아이스크림 맛보기는 지금 이 순간에 남을 수 있는 가장 쉽고 편리한 방법 중 하나다. 과거는 흘러가 버렸고 미래는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우리 마음은 항상 그런 것들에 빼앗겨 있다. 지금 이 순간에 남는다면 비껴만 가던 시간도 손에 잡히게 될 것이다.


# 화장실 불 끄고


어린시절 놀이터에서 정신없이 놀다보면 해가 저물고 친구들은 하나 둘씩 집으로 돌아가고 주변은 점차 어두워 진다. 밤이 오면서 시시각각 변하는 그 어둠의 연속성은 어린 나에게 벅찬 감동이었다. 왠지 모를 희열과 희망이 솟아나 청색의 하늘을 바라보며 주먹을 불끈 쥐고 내일은 더 늦게까지 놀테다라며 다짐을 하곤 했다. 마치 애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마시는 진한 커피의 향기에 취한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던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역시 어린이는 멜라토닌의 분비가 왕성하고 또 민감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멜라토닌이란 빛이 줄어들면 분비가 늘어나는 수면 호르몬인 동시에 몰핀의 수백배에 달하는 다행감을 형성한다. 그리고 비타민E의 수백배에 달하는 항산화 효과도 있다고 한다. 하나의 호르몬만으로 노화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이가 들수록 멜라토닌의 분비량이 차츰 줄어 결국 노인들은 수면시간이 점차 줄어들게 되고 그에 따라 신체기능이 빠르게 하향곡선을 그린다고 추정되고 있다.

현대인들은 낮은 물론이고 밤 늦게까지 형광등, 텔레비전, 컴퓨터 등의 불빛 안에서 살아간다. 어떤 사람은 어둠이 무서워서 잘 때도 불을 켜놓는다고 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어둠이 술익어 가는 할머니의 촌집처럼 포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화장실에 들어갈 때면 한번씩 불을 끄고 들어간다. 내 마음에도 검은 색 차양이 내려진다. 그리고는 어둠 속을 주시하며 뭔가를 보려고 애써 보기도 한다. 암순응이 되면 뭔가가 보이겠지 기대해 보지만 틈새로 들어오는 가느다란 광선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구석쪽을 바라보며 뭔가를 인식하려고 애쓰는 내 노력은 결국 배신 당하고 만다.

그래도 끝까지 보려고 애써 보라. 당신의 마음이 당황할 때까지. 우주 비행사들은 특별한 깨달음을 얻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지구 밖의 풍경을 보는 것도 그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무중력 공간에서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그 순간 마음이 당황하는 것이 계기가 될 수 있다. 명상을 또 다른 말로 마음공부라고도 한다. 마음은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록 강력한 놈이다. 화장실 불 끄고 고요한 가운데 후라이팬으로 계란 뒤집 듯이 당신 마음도 한번 뒤집어 보라. 마음의 이면을 한번이라도 볼 수 있다면 더 이상 마음에 끌려다니지 않을 것이고 마음이 당신의 뜻에 충실히 따르게 될 것이다.


# 텔레비전에 몰입할 때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서 저녁식사를 한 뒤 쇼파에 기대어 텔레비전을 본다. 바로 옆에서 책을 읽던 아내가 뭔가 말을 한 것 같은데 너무 집중해서 텔레비전을 보느라 듣지 못하고 '뭐라고?' 다시 되묻는다. 조금 후 아내의 말을 또 못 듣고 되묻다가 결국은 잔소리를 듣는다. 텔레비전 드라마 속의 텔레비전 보고 있는 인물에게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 드라마 속 인물을 자세히 살펴보거나 혹은 자신의 경험을 되살려보자. 자신이 좋아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몰입할 때면 모든 감각기관의 초점이 텔레비전에 맞추어져서 귀도 쫑긋해지고 고개가 약간 숙여져서 두눈은 상방 코측으로 모여진다.

평상시 인간의 정신적 자원은 유한하다. 그래서 쓸데없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다니면 피곤해질 뿐이다. 평화로운 내 가정 안에서 휴식시간에 텔레비전을 몰입해서 보느라 주변의 상황을 잘 살피지 못하고 있다고 해서 위험에 빠질 일 따위는 없다. 하지만 조금쯤 회의적이 되어 볼 필요는 있다. 어! 저게 뭐길래 내가 이렇게 얼이 빠져서 보고 있는걸까? 텔레비전에 맞춰진 당신의 초첨을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당신에게로 한번쯤 돌려보라. 그리고 또 몰입하고 또 돌아보라.

이 상황은 컴퓨터게임을 하는 도중에도 적용될 수 있고 대인관계에서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도 마찬가지다. 따지고 보면 인생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미 끝나버린 축제를 회상하란 말이 아니다. 세상을 향해 빙글빙글 춤추고 있는 그 순간 자신을 향해 돌아보란 말이다. 마치 그대로 멈춰라 놀이처럼 돌아보는 순간 세상은 당신을 위해 잠시 멈춰설 것이다.

부처님의 비법이라 불리우는 비파사나 명상이 바로 이것이다. 그렇게 끊임없이 텔레비전으로부터 자신을 돌아보다 보면 눈이 하나 더 생긴다. 그 마음의 눈은 한번 생기면 자신을 뒤돌아 본다는 의식도 없이 항상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게 된다. 그런데 텔레비전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자꾸 자신을 뒤돌아 본다고 하다가 나중에는 텔레비전 내용도 생각 안 나고 쇼파에 앉아서 도대체 뭘 했나 고민하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명상의 전통에서는 마음의 눈은 반쯤만 뜨라고 한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만 텔레비전도 계속 재미있게 볼 수 있도록. 원래 고수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 법이다.

약간 내용이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한 이야기는 아주 중요하다. 명상에서 종교색을 빼 버리면 결국 잠재된 인간의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능력 개발의 핵심은 사용 가능한 두뇌 용량을 더 확보하는 것이다. 여유가 커지면 효율성은 당연히 따라온다. 텔레비전에 몰입할 때는 일상생활에서 가장 쉽고 흔하게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이며 시야를 넓힌다는 것 자체가 뇌의 쓰임새를 늘이는 것이다.


# 엉덩이 명상법


책 제목이 명상비법인데 어째서 명상하는 방법을 안 가르쳐 주냐는 독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부처님이 보리수 나무 밑에서 명상하는 모습은 너무나도 유명해서 많은 사람들이 명상은 그렇게 앉아서 하는 것이라고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부처님 자세는 가부좌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명상은 자세와 관계없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가부좌는 수천년간의 수 많은 사람들의 시행착오를 통해 명상을 위한 자세로 가장 적합하다고 알려진 것은 사실이다.

또한 가부좌는 자세는 명상을 위한 것이기 이전에 요가 자세의 하나로써 그 자체로만 따져도 강력한 효과가 있다. 하지만 다리가 짧고 허벅지에 살이 많은 동양인에게는 따라하기가 힘들 수 있고 좌식생활에 익숙치 않은 서양인들에게도 적합하지 않다. 원래 다리가 날씬하면서 긴 인도계통 사람들을 위한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 양쪽 다리를 꼬아 발을 다른쪽 다리의 허벅지에 올리고 허리를 편다. 허리는 너무 꼿꼿하게 펼 필요는 없다.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붙이고 나머지 손가락을 편채 무릎 위에 놓고 턱을 약간 당긴 상태로 눈을 감거나 반쯤 뜨면 된다.

다리가 짧아 도저히 가부좌를 따라 하지 못하겠고 반가부좌를 하곤 했다. 반가부좌는 양쪽 다리를 꼬으는 것이 아니라 한쪽 다리만 다른 쪽 다리에 올리면 된다. 참고로 반가부좌는 한쪽으로만 계속 하면 척추에 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한쪽씩 번갈아 가면서 하는 것이 좋다. 어쨋든 한번 따라해 보라. 앉아서 뭘 어떻게 해야 되냐고 묻지 말고 무작정 부처님 흉내를 한번 내 보라. 그리고 절대로 30분 동안 일어나지 마라.

벌받는 것도 아니고 극기훈련도 아닌데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되나? 손발이 저리고 아픈데 이러다가 마비되는 것 아니냐? 이렇게 있으니 가슴 속에서 뭔가 막 끓어올라 미칠 것만 같은데 계속 해도 되나? 이런 생각,느낌,감정들을 바라보며 30분 동안 즐겁게 머물러라. 너무 열받는다 싶으면 숨을 가늘고 길게 쉬어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제까지 도 닦는 사람들이 저렇게 앉아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해 했다면 이제 알게 될 것이다. 내용은 달라도 결국은 아픔, 논리, 욕망 등 마음의 행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은 같다.

엉덩이 명상법은 단순하다. 엉덩이로 버티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쉽지는 않다. 버티고 버티다가 무너질 것이고 무너지고 또 무너지는 순간 엄청난 긴장이 일시에 해소되어 버린다. 마치 우주의 탄생 빅뱅처럼 한곳에 응집된 에너지가 폭발하면서 엄청난 속도로 확장되는 것이다. 항상 폭풍이 몰아치던 당신의 내면에 드디어 처음으로 폭풍 후 잔잔함 아니 텅빔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대로 이불 속에 들어가서 푹 자라. 숙면은 물론이고 이제 명상가라는 자부심과 함께 행운이 함께 할 것이다.


#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


요즘 컴퓨터 성능이 향상되어서 윈도우창에 수개의 프로그램을 한꺼번에 띄워 놓고 작업하는게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지만 과거에는 PC에서 이런 멀티테스킹(다중작업)은 도전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프로그램을 일부러 수백개를 띄워보라. 아마 컴퓨터 메모리가 모자라서 먹통이 되어 버릴 것이다. 그래서 결국 리셋버튼을 눌러서 재부팅을 해야지 다시 컴퓨터가 돌아가게 된다.

인간의 뇌용량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는가. 몇개의 프로그램을 동시에 돌릴 수 있을 것 같은가. 과거 무의식이라고 불리던 비의식은에서는 인식하지 못하는 프로그램이 지금도 수만개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의식에 비하면 전체의식에서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의식상태에서는 기껏해야 열개 미만의 작업이 가능할 것이다. 솔직히 열개도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이나 가능하지 보통사람이라면 2-3개의 작업을 동시하라고 해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우선 눈을 감고 심사숙고 해보자. 내가 당면한 최대의 문제가 무엇인가. 예를 들어 직장을 못 구해서 답답하다라는 문제가 첫번째로 떠올랐다. 그럼 첫번째 문제에 대해서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고민을 해 보라. 문제의 해결 방식이나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만큼 집중해서 고민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다 보면 결론이 하나 툭 튀어 나온다. 그 결론이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는 신경쓰지 마라. 다만 그 결론이 당신의 전 의식 즉 존재 전체로부터 나온 것이어야 한다. 그 결론이 예를 들어 자본의 흐름이 원활하지 못하다라고 치자. 첫번째 문제에 이어 두번째 문제가 나타난 것이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이제 두번째 문제에 집중할 차례지만 그렇다고 첫번째 문제를 잊어 버리면 안된다. 세번째 문제가 나타나더라도 첫번째, 두번째 문제는 여전히 의식상태에 있어야 하고 각 문제들의 연관성도 세번째 문제에 집중하는 것만큼 생생하게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은 아주 무식하고 단순한 방법이다. 용량이 넘어가는 많은 생각들로 머리를 포화시켜 버리려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이 많아 고민인 사람에게 추천해 주고 싶다. 나는 일곱번째 문제 정도에서 머리가 꽉 차 버렸다. 그 순간 자동으로 머리의 모든 생각들은 지워져 버리고 깨끗한 상태로 재부팅이 되는 것이다. 근데 말처럼 그렇게 만만치는 않다. 불교의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의 화두를 수년간 십수년간 되새기기도 하는데 이 방법은 불과 30분 안에 그런 일을 해내려는 것이다. 그러나 재부팅 되는 순간 픽 웃음이 난다. 내 머리(의식)도 별게 아니군 겨우 일곱개 프로그램 밖에 못 돌린단 말이야?


#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때


하루 중에 얼마나 깨어 있는가. 여기서 깨어있다는 표현은 버스를 타고 있는데 승객 중 누군가가 갑자기 칼을 꺼내 들고 다 같이 죽자고 위협할 때 당신이 취할 행동과 의식상태인 것이다. 현대인들은 무서운 동물들을 피해 동굴 속으로 숨어야 할 이유도 없다. 다만 사회가 요구하는 것과 당신의 이상이 충돌하여 생기는 장기적인 스트레스는 필연적으로 괴로울 뿐이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문이 열리는 그 순간 괴한이 칼을 당신을 향해 내밀고 있음을 상상하라. 그리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살아남을 준비를 하라. 괴한보다 당신이 0.1초라도 대응이 늦으면 당신은 죽는다. 그 순간 찰나의 시간이 흐리멍텅한 의식으로 지내는 10시간보다 귀한 것이다. 가슴은 두근거리고 손에는 땀이 날 것이다. 운동신경은 풀가동 되고 있으며 두뇌는 위험을 극복할 수백가지 방법 중 최선의 하나를 찾고 있다.

의식의 날을 부지런히 갈아 놓아라. 인간 사회 역시 정글의 법칙이 존재하며 칼날이 목을 스쳐가는 순간들이 수없이 다가온다. 준비하지 않은 자들은 이미 당했는지도 모른채 왜 상황이 이렇게 됐나 한탄만 할 뿐이다. 사무라이들은 잘때도 칼을 품에 안고 잔다고 하며 잠을 자는 순간에도 인기척에 대비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른다고 한다. 다른 고민도 많을 여러분들께 그런 경지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다만 일상에서 깨어있기를 연습해 두라는 것이다. 엘리베이터가 아니라면 방문을 열때나 차문을 열때도 좋다.

인간의 의식수준은 동화책의 인물들처럼 잠잘때,졸릴때,깨어있을때 이렇게 3가지로 나눠지지 않는다. 의사들은 보통 뇌를 다쳐 의식수준이 떨어진 환자들을 대화,움직임,통증에 대한 반응 등에 따라 5가지로 나눠서 평가한다. 또한 특정 대상에 대해서만 의식이 또렷하고 그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얼이 빠진 것과 같은 트랜스 상태도 존재한다. 명상상태처럼 자신과 주변의 모든 것에 대해서 너무나도 인식이 명확해지는 순간도 있다. 이렇듯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때와 같은 일상에서도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때 즉각적으로 효율적인 대응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


# 잠드는 순간 바라보기


가위에 눌려본 적이 있는가. 몸은 아직 잠들어 있지만 정신은 깨어난 상태. 피곤하거나 불안한 상태일 때 이런 현상이 더 자주 일어난다고 한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가위에 눌릴 때는 귀신소리가 들린다든지 자신에게 해를 끼치려는 누군가가 보인다든지 한다는 것이다. 마음은 이렇게 겁쟁이다. 자기가 의도하지 않은 뜻밖의 상황에 맞부딛치면 자기가 관장하지 못하는 상황은 외부의 가상물에 의한 것이라고 회피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음은 단순하지만 강력하다. 귀신소리라든지 사람의 형체라든지 너무나 생생한 것은 사실이다.

가위에 눌리는 것은 수면에서 깨어남으로 넘어오는 과정 중에 있지만 꺼꾸로 깨어있는 상태에서 수면으로 넘어가는 과정도 흥미롭다. 잠드는 순간을 바라보라. 몸은 다음 날의 신체기능회복, 학습, 집중력 등을 위해 잠이 들었지만 아직 정신은 외부를 마지막으로 지각하고 있는 그 상태를 잡아라. 그리고 한 계단만 더 건너면 잠의 나라에 다다르게 되는 그 곳에 머물러라. 처음에는 입면기간이 너무 짧아 눕자마자 의식을 잃고 잠에 빠져들거나 혹은 머리에 쥐가 나도록 골똘히 생각하는 바람에 불면증에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점차 숙면을 취할 수 있으면서도 자각의 강도가 쎄질 것이다.

잠드는 순간을 잡기 시작하면 잠들어 있으면서도 일말의 자각이 남아 여러가지 일을 할 수 있다. 그 자각은 마음의 억압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다. 특히 꿈을 꿀때는 내가 꿈을 꾸고 있구나 알 수가 있다. 즉 자각몽이 시작된다. 더 나아가면 꿈 자체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가 있다. 꿈을 조절해서 내 마음대로의 상상력으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낮시간에도 우리 의식은 거의 잠들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경우가 많다. 일을 하면서도 멍하게 딴 생각 즉 백일몽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잠드는 순간 바라보기를 하다보면 의지와는 상관없는 자각이 생겨나 일을 매우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된다. 더군다나 그 자각은 마음의 방해를 벗어나 보다 넓은 상상력과 주위에 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명상법은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단 아직 성장기 청소년이라면 피하는 것이 좋다. 잠은 성장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며 아직 잠에 대한 매커니즘을 명료하게 밝히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 버스타고 창밖 쳐다보기

요즘 같으면 난리가 날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필자는 홀로 시내버스를 타고 유치원을 다녔다. 그리고 쭉 버스를 타고 초중고를 다녔었다. 버스를 타면 기름냄새라든지 급출발 급정차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멀미로 고생을 하기는 하지만 어린시절 나는 무심코 지나치는 버스 차창 밖 풍경들에 주목하곤 했다.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눈에 들어오면 짧은 순간 시점을 그곳에 고정해 버스가 움직이는 동안 계속 주시한다. 그러다가 시야 밖으로 사라지면 또 다른 것으로 전환해 집중을 하는 것이다. 중간에 끊어지면 안되고 계속 집중-전환-집중이 연결되어야 한다. 눈알을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는 것 그리고 집중하는 대상과 배경에 대해서 무빙 사진을 찍듯이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 놀이법은 평범한 일상 생활 속에서 순간적으로 시각의 초점을 맞추어 의식상태을 높이 확장시키도록 도와 주는 방법이다. 신경쓰지 않았다면 분명 그냥 지나쳐 나와는 평생 아무 상관도 없게 되어 버렸을 그런 이미지들이 평생 내 뇌리에 남아 유용한 정보로 활용될 수 있도록 무의식에 저장되고 그로 인해 무의식의 지평이 넓어지게 된다.
 
물론 그 이미지가 가진 정보의 가치를 따지는 것보다도 별로 자극적일 것도 없이 어떻게 보면 따분할지도 모르는 일상에서도 순간 포커스를 맞추고 또 다른 포커스로 전환해 현상을 남보다 빠르고 다양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훈련법으로써의 가치를 말할 수 있다. 꼭 버스가 아니더라도 차도를 달리는 차들의 대열을 바라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2차선 도로만 되어도 따르게 움직이는 차들을 놓치지 않고 완벽하게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쉽지 않기 때문에 도전할만하고 그래서 재미가 있는 것이다.
 
창밖 쳐다보기를 실행해 보면 시점이 빠르게 전환이 되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이것 저것 따질 시간이 없다. 짧은 순간 인식하는 그 정보가 그대로 무의식에서 처리가 되고 전의식을 통해 감지된다. 중고등학생들이 영어공부할때 많이 썼던 말로 현상에 대한 직독직해가 가능해지는 셈이다. 의식과 무의식을 중계한다는 전의식이란 결국 노력과 집중에 대해서는 역방향을 가지고 있으며 노자의 무위자연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전의식이란 것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뇌신경들의 네트워킹에 방해가 되는 긴장요소가 제거되고 의식이 확장되도록 정돈된 흥분이 나타나 네트워킹에 원활하고 강렬한 소통이 진행되는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Posted by 성희짱